‘월곶돈대’는 동쪽의 해안 돈대에서는 가장 위쪽에 위치한 돈대로, 그 위치는 강화대교를 건너 월곶리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본래 이 곳은 ‘월곶진’ 이 있던 곳으로, 앞선 덕진진이나 광성보처럼 성문이 복원되어 있고, 성벽을 따라 높은 구릉에는 월곶돈대가 위치한 형태다. 월곶진은 그 위치상 중요한 교통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과거에는 육로가 그리 좋지가 않았기에, 수로를 통한 교역과 조세의 이동 등이 활발했다.
따라서 월곶진은 한강 하구를 나와 중국과 서해 쪽으로 내려가는 교통로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데, 당장 월곶돈대에 있는 ‘연미정(燕尾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연미정의 이름은 마치 임진강과 한강에서 만나는 물길이 흡사 제비꼬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월곶돈대로 올라가는 중간에 황형의 옛 집터인 ‘황형택지’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안내문을 보면 황형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중종 때 북방 여진족들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으며, 삼포왜란 때는 전라좌도 방어사로 왜군에 맞서 승리한 장군이다. 황형은 이러한 공으로 공조판서에 오르고, 중종이 ‘연미정’을 하사해 말년은 황형에서 이곳을 만년을 보냈다. 또한 연미정은 ‘정묘호란(1627)’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흔히 <남한산성>으로 잘 알려진 ‘병자호란(1636-37)’ 이전, 후금의 침입이 있었던 정묘호란 때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 조선과 후금은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체결한 장소가 바로 연미정이다.
현재 연미정(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4호)는 월곶돈대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미정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북한 땅인 황해도 개풍군을 비롯해 김포와 파주 등이 한눈에 조망된다. 바로 눈 앞에 한강 하구가 펼쳐져 있는데, 어쩌면 육지와 달리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분단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건 아닌가 생각된다. 한 때 이 곳도 민통선 출입 지역이라 들어가는데 다소 까다로웠다고 했는데, 지금은 별도의 허가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사극의 촬영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강화평화전망대는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북한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고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게스트 룸이 있다.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이 있다. 또한 전쟁의 참상이나 흔적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전망시설과 북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전망대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이 있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가 위치해 있으며,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연백군으로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강화군은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 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하였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1층] 관리실, 통일염원소, 휴게실 및 식당, 기념품매장
[2층] 전시실,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3층] 북한땅 조망실(시청각교실), 옥외 전망대
[지하1층, 4층] 군부대 전용시설
[야외] 망배단
교동도에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했다. 이후에 이들이 고향에 있는 시장인 '연백장'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시장이 바로 대룡시장이다.
골목 곳곳에는 교동 이발관, 동산약방 등 오래된 간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가게들과 벽화들, 조형물들이 있으며 드라마 전설의 마녀 촬영지도 대룡시장에 위치해있다.
교동도는 분단 이전 황해도 연백군과 뱃길로 왕래가 잦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교동도에는 전쟁 중에 연백군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향을 그리며 연백군이 마주 보이는 곳에 비를 세우고, 매년 북녘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린다.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도와 관련된 시대별 유물과 자료를 전시해놓은 곳으로, 고인돌이 많은 강화도의 특징을 살려 고인돌 관련 전시부터, 선사시대, 고려, 조선, 근대 등 폭넓은 강화도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강화역사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전통한옥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지역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실물, 디오라마, 복제품, 영상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사용하여 전시하고 있다.
로비에는 강화동종과 선두포축언시말비가 전시되어 있으며, 다양한 기획전시가 개최되고 있다.
2층 상설전시실은 고인돌의 땅 강화, 강화의 삼국시대,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로 전시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상설전시실은 고려 강화, 조선 · 근대 강화, 삶과 민속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한옥실에서는 안방과 사랑방, 누마루의 구조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한옥이 실물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의 유적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 시대에도 역사적으로 관련되며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는 곳이다.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이런 유물들을 살펴보며 관람한다면 역사를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53개의 돈대(墩臺)가 섬 전체를 에워싼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갑곶돈대는 숙종 5년(1679)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이곳은 예로부터 외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행히 같은 해 10월 13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주하였다. 양헌수 장군은 강화도 남쪽 해협을 지킨 어재연 장군과 함께 강화도를 지킨 명장으로 남아 있다. 어재연 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순국을 하였지만 양헌수 장군은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병마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한다.
우리 선조의 생명으로 지킨 이 곳은 지금은 공원처럼 시설이 꾸며있어 부담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다.
갑곶돈대의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금속활자 중흥비이다.
갑곶돈대는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원종 11년)까지 몽골과의 줄기찬 항전을 계속하며 싸울 때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갑곶돈은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의 지리적인 이점은 군사상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갑곶돈의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면 얼마나 갑곶진이 군사적 요충지였는지를 알 수도 있다. 갑곶돈의 유래는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강화도의 갑곶돈대는 화려한 모습보다는 오랜 역사의 자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었다.
적은 백성과 작은 땅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우리의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사적 제227호인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지금의 광성보는 165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광성보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신미양요’(1871년)다. 이곳은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하루 만에 조선 병사 243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성보 안의 용두돈대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데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다. 광성보 안에 딸린 원형의 돈대인 광성돈대에는 당시 사용했던 대포, 소포, 불랑기가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도 신미양요 때 열악한 무기로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당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쌍충비각 등이 남아 있다. 용두돈대에 못미쳐 구릉 정상부에 둥그렇게 쌓은 손돌목돈대에서는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숙종 대에 이곳에 덕진정사라는 행궁을 지었다. 이후 행궁이 읍내에 새로 건립되면서 덕진정사는 폐지됐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사적 제 266호이다.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