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해발 118m의 오두산 정상에 있습니다.
1992년 9월 8일 이산가족의 망향의 한을 달래주고 통일교육의 체험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국민의 통일염원을 담아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로 건립되었습니다.
개관 이래 지금까지 2,000여만명의 내외국인 방문객이 즐겨 찾는 국제적인 통일안보 관광지이며 옛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나오는 오두산성터(사적 제351호)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성터는 고대로부터 군사 요충지로 여겨져왔습니다.
지금은 서부전선의 최북단으로 남과 북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2km의 짧은 거리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자유로 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한땅이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왕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남북분단의 현장으로 실향민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곳 입니다.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는 북한 황해도 지역의 주택들과 김일성 사적 탑, 소학교, 북한군 초소와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에는 개 성시 북부의 송악산도 보입니다. 또한, 남쪽으로 바라보면 거대한 한옥 구조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두산통일전망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냉전의 유산인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이해하게 하고 민족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통일조국의 미래를 생각하고 통일의지를 다지게 합니다.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이곳에 전시된 많은 자료들을 통하여 통일의 절실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북한을 바르게이해하고 남북이 상호 대치하고 있는 현장을 직접 바라볼 수 있을겁니다.
- 평화곤돌라, 망배단, 망향의 노래비, 자유의 다리, 증기기관차, 독개다리 -
1972년에 북한 실향민을 위해 당시에 1번 국도를 따라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끝지점에 임진각이 세워졌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지점,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로 경기도 내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임진각 연건평 2,442㎡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공간 구성, 3층 전망대는 임진강과 자유의 다리 일대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으며, 2층에는 국민관광지 최초 위생등급 A를 받은 임진각 한정식, 1층에는 DMZ 특산품 및 다양한 기념품을 만나볼 수 있는 1년 365일 연중무휴 임진각!
또한 입구에는 파주 스타광장이 있는데 파주가 고향이거나 파주를 빛내는 가수, 탤런트, 영화감독, 축구선수, 홍보대사들 36인의 손도장 동판이 설치돼 있습니다.
매년 망배단에서 실향민들이 설날과 추석 때 모여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2~3월 중에는 '임진강 민속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 외에도 매년 '파주 장단콩 축제' 등이 개최되었으며, 한시적으로 '2006 세계평화축전', 'MBC 가요대제전' 등의 행사도 개최되었다. 매년 이곳에서 타종행사가 열린다.
휴일 일평균 1만여 명 이상, 평일에도 일평균 수천 명씩 방문하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유명 관광지이다. 연간 방문객은 200만 명 이상. 개관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이다.
1974 년 9 월 5 일 북한에서 귀순 한 김부성이 '자신은 남측 땅굴을 측량 한 측량 기사인데 비무장 지대 안에 땅굴이있다'고 제보하면서 작업이 시작되고.
제 3 땅굴은 1978 년 10 월 17 일 판문점 남방 4km 지점 비무장 지대 안에서 발견 된 예. 이 땅굴은 군사 분계선의 서쪽 1.2km 지점으로 추정되는 북한 지역에서 지하 평균 73m의 암석층을 굴착하여 1,635m 가량 남쪽으로 내려와있다.
이 땅굴은 아치형으로 너비와 높이 2m, 길이 1.635km이고 73m 깊이에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로 1 시간당 3 만 명의 병력 이동이 가능한 규모이며 규모면에서는 다른 땅굴과 유사 하나 무엇보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4km, 통일촌에서 3.5km 밖에 안되는 곳으로 서울하고 불고기 52k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냐 평가되고 있습니다.
파주시에서 운영하는 안보 관광 코스로 코스가 2 가지인데 둘 다 제 3 땅굴이 들어있다. 출발은 임진각이나 도라산역에서한다.
제 3 땅굴은 하루 9 번 운행하는 셔틀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고 모노레일을 타고 땅굴 속까지 걸어 가지 않아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관람이 가능합니다. 단 셔틀 승강기는 유료 다.
도보 관람도 새로이 넓직 한 출입로를 만들어보고 거리라고 해 1km 남짓 정도 라 크게 힘들지만 경사도 더불어 지하 73m 깊이로 매우 습기 찬 곳 조심이라 건강에 이상이있는 사람 (고혈압이나 천, 비만 등) 하는 게 좋다.
도라산역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京義線) 철도역 중 하나로 경의선 최북단 역이다. 민통선 지역 내에 있으며 인근의 도라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약 700m, 서울까지 56km, 평양까지 205km, 개성까지 17.6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역은 당초 DMZ에 복원하기로 했던 장단역이 취소되면서 남쪽의 문산 역과 북쪽의 봉동역 사이에 신설되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른 남북협력사업 일환으로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은 2001년 4월 착공, 남쪽 의 임진강역까지 3.7km 구간을 연결하는 공사가 완료되어 2002년 4월 1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도라산역에는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등 안보 관련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도라산 역사(총 면적 4940m2)는 모두 100억 원의 건축 공사비가 투입돼 대합실, 역무실 등 역사 시설과 향후 남북 왕래에 대비한 간이출입장(통관검사소)이 설치돼 있다.
열차역 중 유일하게 ‘국제선’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도라산역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도라산역사는 남북 왕래가 가능해질 경우 북한은 물론 중국 등 대륙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관세 및 통관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출경 과 입경의 출입사무소를 갖추고 있는 역으로 검색대를 지나면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국제선 플랫폼에서 북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국내선은 물론 국제 선의 철길을 확보하여 남북의 왕래를 대비했고 통일의 염원을 담아 설계한 도라산역사 지붕은 남과 북이 손을 맞잡는 모습의 태극무늬를 형상화하였다
도라산역사 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의선 철도 기공식(2000년 9월 18일) 축하 서명 침목과 2002년 2월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 시 전 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해 연설을 하여 한반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두 대통령은 “이 철도가 한민족을 이어주길 기원합니다.”라며 철도 침목에 서명하게 되는데 도라산역사 내에 그 연설 내 용과 복제 철도 침목이 전시되어 있다.
도라산역은 경의선 최북단 역으로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2003년 개성공단이 설치되자 경의선을 이용한 물자수송이 논의되었고 경의선을 보수하여 문산역과 개성 특별시의 봉동역 사이에 화물열차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2007년 5월 17일 경의선(문산~개성역)과 동해선(금강산~제진역)을 시험 운행하였다. 동해선은 북측에서 남측으로, 경의선은 남측 문산역에서 출발하여 도라산역을 거쳐(문산역~개성역 구간 27.3km)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뒤 판문역을 거쳐 개성역에 도착했다.
1906년 4월 3일 개통된 경의선은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과 평양 신의주까지 연결된 철로다. 경의선이 개통된 지 5년 후인 1911년 11월에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어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신의주 너머 중국 단둥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경의선은 경부선과 함께 일본, 한국, 만주, 중국, 대륙을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의선은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연결해 주는 국제 철도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경의선 철길은 파괴되어 이용이 중단되었다.
도라산역은 민통선 지역에 있으며 1일 2회 운행하는 DMZ 평화열차를 이용해 방문하거나 임진각에서 DMZ 연계 관광 셔틀버스를 이용해 관람할 수 있다.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 도로 연결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철도, 도로를 이용한 인적, 물적 왕래가 이루어질 경우에는 원활한 세관. 출입심사. 검역등 출입심사 업무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여 한국정부는 법무부, 보건복지부, 관세청 등 관련부처 실무자들로 구성된 경의선 출입관리시설 실무지원팀을 구성 하였다
특히 육로를 통해 남북을 왕래하는 인적, 물자에 대한 원활한 출입업무를 위해 2003년 11월 20일 통일부 직제로 신설된 남북출입관리사무소는 남북간의 인적, 물적 교류와 관련한 세관 출입심사 검역등의 출입업무를 총괄한다
남북출입사무소는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도로를 이용한 정상적이고 원활한 열차, 차량의 운행과 사람들의 왕래가 이뤄질수 있도독
남북출입사무소(南北出入事務所)는 철도 및 도로를 이용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출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통일부의 소속기관이다.
2012년 9월 27일에 발족하였으며,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과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 위치하고 있다.
서부 전선 최북단을 지키고있는 도라 전망대는 군사 분계선으로부터 1.5km 군사 해발 167m의 도라산 정상에 그리고 DMZ와 개성 공단, 개성시가 지 대신 북한 선 마을, 송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정면에 보이는 개성은 서북 방향이며, 오른 쪽 태극기가 보이는 대성동 마을이 북쪽 방향이다. 연건평 243 평으로 관람석 500 석, VIP 실, 상황실, 주차장 (30 ~ 40 대) 등의 부대 시설이 있고 일반에게는 1987 년 1 월부터 공개 된 국방부에서 설치 한 통일 안보 관광지이다.
파주시는 2018 년 10 월 22 일, 옛 전망대에서 12m 높은 곳에 평화와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하여 외벽으로 디자인 한 지상 3 층 규모의 신 도라 전망대를 건립하고 실향민과 남북 분단 현장을 보러 오는 외국인 연간 등 80 여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이다.
조선 시대에는 4 차례에 막바지에는 4 차례에 막바지에는 파상적 인 공격을 해병대가 끝까지 사수 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차지하는 판문점에서 문산에있는 지역을 지킬 수있게됩니다.
도라산의 유래는 이렇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개성에 도읍을 정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며 신라 천년 사직의 문을 닫았다. 경순왕은 왕건의 큰 딸인 낙랑 공주와 재혼하여이 산 오른편 중턱에 걸쳐 작은 암자 인 영수 암에서 43 년을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산 정상에 올린다. 나라 잃은 망국의 눈물을 흘리며 신라의 도읍지 인 서라벌을 바라 보았다하여 도읍도 (都)에 신라 라 (羅)를 써 '도라산'이라는 이름이 붙게되었다.
┃ 비무장 지대 (DMZ) ┃ 전면의 숲과 넓은 들판은 남북한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위한 완충지 대인 비무장 지대 즉, DMZ (Demilitarized zone). 비무장 지대에는 군사 분계선이 있고,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 2km 지점에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군사 분계선은 저수지 남쪽으로 낮은 산이 연결 지점은 남한, 숲이없고 들판 인 곳은 북한이다. 군사 분계선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시작점 인 임진 강변에 1 번이라면 말이 꽂혀 있고 100 ~ 200m 간격으로 원도 고성까지 1,292 개의 강변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다 연결하면 248km, 우리가 말하는 휴전선 155 마일이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북북서방으로 약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소재한 지역이다. 원래 지명은 널문리였는데, 1951년 10월 정전회담이 개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회담 일방인 중국어 표기를 위해서 판문점으로 고쳐 쓰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휴전 당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및 북한군이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합의,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 군사분계선(MDL)상에 설정한 것이다.
오늘날의 판문점이라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6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와 북한의 황해북도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판문점리 접경 동서 800m, 남북 600m에 걸쳐 장방형으로 설정되어 있다.
공동경비구역 설치 이후 쌍방 군정위 관계자들은 구역내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어 남북이 분할경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다.
이곳의 우리 행정구역상 지명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다. 그러나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고 있는 특수지역이다.
공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며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하여 북한 측의 '판문각', 유엔 측의 ‘자유의 집' 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 남북 공동 성명 등으로 판문점은 당시 5천만 한민족의 가슴을 한때 뜨겁게 한 바가 있고, 1973년 6월 남북조절위원회가 결렬된 지 7년 만인 1980년 8월부터는 남북총리회담의 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려 8차까지 거듭한 끝에 북한 측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공전(空轉, 없던 일로 됨)된 일도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2015년 8월 서부전선 포격 사건의 연장선으로 이루어진 남북고위급접촉으로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로 한국전쟁 교전당사 사이에 맺어진 정전 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의와 협상의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1971년 9월 20일에 열리게 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계기로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한을 왕래하는 통과 지점으로 활용되었다.
2016년 2월 11일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건으로 인해 북한 측에서 판문점 연락 통로의 폐쇄를 선언한 상태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 마을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의 행정 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造山里)였으며 약 50세대 300여명의 주민이 농업을 생업으로 살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외부와의 접촉이 없는 시골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주민들이 후방으로 피난을 가면서 마을에는 16세대 60명의 노인과 아이들만 남았으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자 피난을 떠났다 돌아오는 주민도 있었다. 1951년 10월, 정전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면서 판문점 근처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군사분계선 상에서 유일하게 전투 지역에서 제외 되었다
자유의 마을(自由의 마을)은 한반도의 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 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 지역으로, 대성동 마을(臺城洞)로도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정전 협정에 따라서 1953년 8월 3일 군사정전위원회가 평화의 마을과 함께 조성하였다. 행정 구역 상의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며, 인구는 2018년 기준 49세대 193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유의 마을은 유엔사의 민사규정과 대한민국 법률이 공동으로 적용되는 특수 지역으로, 행정구역은 파주시에 속하나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은 유엔군 사령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마을의 주민은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 받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군사분계선 북쪽에는 기정동(機井洞) 평화의 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마을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지이다. 자유의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한반도의 분단과 대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파주시에서는 자유의 마을을 안보 관광과 농촌 체험 마을로 조성하기로 계획하고, 2014년까지 총 25억원을 투입하여 마을에 작물 재배 체험장, 특산품 홍보 판매장, 마을 주변에는 안보 체험 길을 조성하였다
자유의 마을은 유엔군 사령부가 관리하는 비무장지대에 있기 때문에 정전협정의 부칙에 의거,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엔사의 관할 구역이다. 이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 민정(民政)중대가 상주하여 마을의 민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형법 및 행정권의 효력이 존재하나 대한민국이 법률적 통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유엔사의 동의가 필요하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50여 년간 미군이 주둔하던 건축양식이 축적된 문화유산 캠프 그리브스는 주한 미군 2사단 506연대가 머물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사용하던 탄약고, 퀸셋막사 등의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지명인 그리브스는 미국 인디언 전쟁 시기인 1879년에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아파치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제9기병사단 소속 클린턴 그리브스 하사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2004년 미군 철수 이후 역사·문화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2013년 12월 14일 225,000㎡(68,000평) 규모로 일반인들을 위한 평화·통일 체험시설로 리모델링하여 민간인 통제 구역 내의 국내 유일한 숙박형 문화예술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군 장교 숙소를 리모델링한 유스호스텔은 최대 240명을 수용할 수 있 다. 1층에는 사무실, 2~3층에는 숙소, 4층에는 실내 활동을 위한 대강당과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군 내무반을 연상케 하는 숙소와 군용식판을 이용 한 식사 등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전쟁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눈 번쩍 뜨고 관심을 가질만한 곳이기도 하다. 2016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서 우루크 기지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배우 송중기가 미군과의 격투했던 장면을 통해 액션을 펼쳤던 정비소를 비롯하여 장교 숙소, 생활관과 체육관 등 다양한 시설이 그대로 보존돼 근대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캠프그리브스 안에는 깡통막사로 불렸던 퀸셋막사(Quonset Huts)가 아직까지 여럿 남아 있다.
분단과 DMZ의 모습을 간직한 캠프그리브스 DMZ 체험관은 미군이 사용했던 막사를 리뉴얼한 유스호스텔을 개관하면서 재생의 공간으로 발돋움한 이후, 2016년부터 시작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평화·안보 체험 과 함께 역사·문화·예술이 집약된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장단출장소 건물 2층에 통일촌의 애환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통일촌 마을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내에 따라서 통일촌이 조성될 때까지의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20여 년 후인 1973년 입주를 끝내고 40년이 지난 시점인 2013년 8월 14일에 만들어진 것이 통일촌마을박물관이다. 전시된 품목들도 특이한 것이 아닌 주민들이 기증한 당시의 생활용품들로서 우리와 친근한 것들이다.
박물관 안에는 입주 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아픈 역사가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 부착된 사진들은 대부분 7~80대의 어르신들이지만 당시는 이분들의 나이가 3~4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이곳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해야 했고 상황에 따라 비록 부녀자들이라도 사격술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도 사격이 가능한 곳이다.
박물관 입구에 부착된 많은 사진의 주인공은 현재 살아 계신 분도 있고 타계하신 분도 있다. 생사와 관계없이 이분들은 통일촌의 역사이기 때문에 함께 기록한다. 전시관 벽에는 이 마을이 조성되기 이전의 6.25전쟁 및 국제 정세가 간단하고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다. 전쟁터였던 이곳에서 많은 탄피와 불발탄, 지뢰 등이 발견되어 마을 조성 당시 이들이 당면했던 어려움과 위험성을 느낄 수 있다.
대전차 지뢰는 꽤 크지만, 대인 지뢰는 아주 작다. 나뭇잎 색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대인 지뢰는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마을을 조성할 당시 군인과 젊은이들에게 철저한 안전 교육을 실시해 치명적인 사고를 예방했다. 오히려 마을 주민 외의 사고가 잦았다.
전시관에는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의 추억을 되살리는 군용품과 비망록이 전시되어 있다. 비망록 옆에 예쁜 그릇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다. 마을조성 시 두 개의 항아리가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는 간장 항아리였고 다른 항아리는 전시된 항아리다. 아쉬운 것은 이 항아리의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1973년 이후 절차만 밟으면 이곳을 방문할 수가 있는데 이 항아리의 주인공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전시관 중앙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만든 짚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공예품들은 통일촌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 많은 유리전시관안에는 지금은 전시품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 주민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이 있다. 낯설지 않은 재봉틀, 라디오, 주전자, 타자기 등이 관람객을 1970년대로 이끈다.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의 구수한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글로 쓰여 부착되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우리를 먼 옛날로 되돌린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로서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결국 통일촌마을박물관은 이곳 동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다.
한쪽 벽면에는 태극 모양이 상하가 아닌 좌우로 된 태극기를 볼 수 있는데, 남북으로 가르지 않고 함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6.25전쟁이 끝난 지 무려 70여 연이 지났지만 우리는 6.25전쟁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야 설명이 필요 없지만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새대에게는 그저 먼 지나간 역사일 수 있다. 때문에 이 박물관에서 그때의 아픔을 공유하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다시금 재조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모든 마을이 지역과 주변의 이야깃거리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통일촌은 대한민국의 전쟁의 아픈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통일촌마을박물관은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 주 6일(월요일 휴관) 운영되나 민간인 통제지역에 있어 승용차의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관람을 원하면 파주시의 ‘DMZ연계 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임진각 주차장 내 DMZ 관광 매표소에서 단체는 오후2시 30분까지, 개인은 2시 50분까지 매표하여야만 관람할 수 있다. 30인 이상은 개별 관광버스로 관람이 가능하며 30인 미만은 셔틀버스를 이용해 관람할 수 있다.
6.25전쟁으로 임진강을 남북으로 건너는 다리는 모두 다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에는 문산 이북 지역의 경의선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임진강철교의 서쪽 부분을 복원해 자유의 다리를 도로용으로 임시로 지어서 판문점 왕래 및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철교 교각 위에 임시로 개설한 교량이어서 일방통행인지라 한쪽에서 차량이 진입하면 다른 쪽에서는 통제될 수 밖에 없으므로 매우 불편했다.
이후 1993년 자유로에서 관문점까지 도로신설 및 확장공사가 추진되면서 임진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게 된다. 건설 당시에는‘자유대교’,‘임진강대교’로 불리다가‘통일대교’라는 이름으로 개통되었다.
통일대교는 이산가족 간의 교류와 남북한 인적,물적 교류 그리고 통일에 대비하여 파주시 문산읍과 민통선 이북 지역인 군내면을 잇는 임진강에 설치된 다리로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고 1998년 6월 15일 개통되었다.
북한과의 회담과 개성공단 출입을 위해서는 통일대교를 건너가야 한다. 남북한의 각종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언론사의 주요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통일대교가 설치되기 전에는 판문점과 민통선 이북 지역 출입을 위해서 임진강 철교에 임시로 지어진 자유의 다리를 이용하였다.
개통 다음 날에는 통일대교를 이용해 현대그룹 정주영 전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했으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길에 오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환송 행사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