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편


호로고루성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변 쪽으로 나지막한 구릉 하나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호로고루 성지(城址)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三國史記』에도 여러 차례의 전투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군사작전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 평양 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가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로고루’라는 어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호로고루라 불렸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忽) : 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서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다.
삼국시대에는 긴장감이 감돌던 군사지역이었지만 오늘날의 호로고루에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기운만이 남아있다. 동쪽에서 보면 약 10m 높이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위에는 흙과 풀이 뒤덮여 있어 작은 언덕처럼 보이기도 하다. 호로고루에서는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걸쳐 많은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붉은 색을 띤 고구려 기와와 회색을 띤 통일신라의 기와가 주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이 삼국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경순왕릉

신라 제56대 왕(927~935 재위)이며 마지막 왕인 비운의 경순왕릉은 임진강 건너 개성과 거의 수평선상에 위치해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장단군(長湍郡)이었으나 휴전선으로 물러나 연천군이 된 장남면 고랑포리. ‘개성 30㎞, 평양 173㎞’라 적힌 공허로운 이정표를 지나면 경순왕릉이 있다. 옛 개경(개성)의 동쪽이며, 남방한계선 200m 아래쯤의 낮은 야산에서 비운의 한을 삭이듯 밤낮없이 임진강 하구만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사적 제244호인 경순왕릉은 유일하게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신라 왕릉이다. 경주에 있어야 할 신라의 왕릉이 왜 연천 땅에 있게 된 것일까?
경순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신라가 망국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당시 왕이었던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고려의 군사가 미치기 전에 견훤에 의해 강제로 자결하였다. 경애왕의 일가친척 중 동생뻘이었던 경순왕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원치 않던 왕의 자리에 올랐다. 경순왕은 이듬해 신라에 도착한 태조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친분을 쌓았으며, 935년 신라 주변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자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태자는 울면서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마의태자이다.
왕건은 경순왕을 자신의 장녀와 혼인하도록 하고, 자신도 경순왕의 사촌과 혼인하여 경순왕은 고려의 왕족이 되었다. 978년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은 경순왕을 왕의 고향인 경주에서 장사지내고자 했으나 고려의 왕족이 된 경순왕의 무덤을 경주에 만들 수는 없었다. 고려의 왕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법 때문이었다. 이에 경순왕의 능은 개경에서 80리 거리인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 현재의 장남면 고랑포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영조 때 지석이 발견되어 새로이 무덤을 쌓았다. 6.25 전쟁  후 수십년 간 돌보는 이가 없어 다시금 소실될 위기에 처했으나 1970년대에 한 병사가 잡목 숲 속에 쓰러져 있는 묘비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사적 제244호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승전OP

승전전망대는 적의 활동을 관측하기 위해 운영되는 최전방관측소이다. 과거 북한군이 침투한 ‘1.21 침투로’가 있는 장소로서 북측 군인들의 활발한 활동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육안으로 북한군뿐만 아니라 북한의 여러 군사시설을 볼 수 있고, 망원경을 통해서 넓은 개활지인 연천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육군 제25보병사단은 관람객들에게 보급로를 통한 도보답사, 1.21침투로, 승전전망대 관람 그리고 교육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1.21 침투로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에 위치한 1.21무장공비침투로는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 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북한은 당시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를 1968년 1월 21일 서울로 잠입시켜 대통령 관저(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시설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8년 1월 19일 21시경 파주시 법원리에 거주하는 나무꾼이 신고하여 군·경 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1968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전개되어 사상자 29명, 도주 1명, 체포 1명(김신조)의 전과가 있었으나 우리 군·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현재 1.21무장공비침투로에는 그 당시 이 곳에 주둔한 미군 제 2사단 방책선 경계 부대에서 설치한 경계 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의 모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관할 군부대에서는 1999년 10월 1일자로 민통선 북방 지역 출입 통제를 일부 완화하여 사전신청에 의한 견학이 가능하다.



상승 OP

상승OP는 적의 활동을 관측하기 위해 운용되는 최전방 관측소로 경계임무는 비룡부대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24시간 빈틈없이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초소의 망원경으로 전방의 북한 초소들과 철책선들 그리고 지금은 비무장지대로 변해서 접근이 불가능한 넓은 연천평야도 볼 수 있다.

관측소에서 비옥한 토지였을 연천 평야가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 있는 모습을 내려다 보면 분단의 세월과 아픔을 새삼 느끼게 된다. 관측소 주변 비무장지대에는 독수리, 참매, 노루, 산양 등 일반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망원경으로 북쪽을 관측하면 북측 초소 군인들의 얼굴과 움직임도 볼 수 있고, 시간대별로 북측의 대남 방송을 들을 수 있어 그야말로 최전방 관측소라 할 수 있다. 실제 1호 땅굴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하여 개방할 수 없으므로, 가장 가까운 관측소인 상승OP에 실제 크기의 모형을 만들었다. 제 1호 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발견된 남침용 땅굴로 선임하사 구정섭이 지휘하는 육군 수색조가 임무 수행 중에,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수상이 여겨 그 곳을 파던 중 북한 초소로부터 갑작스런 사격을 받았다.

이에 우리 군도 응사하면서 조사를 계속 한 결과 땅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바로 남침용 제1호 땅굴이다. 이 땅굴은 서울로부터 52km, 개성으로부터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지표에서 2.5m ~ 4.5m 깊이이며 철근이 세 가닥 들어간 조립식 콘크리트를 사다리꼴로 엮어 튼튼하게 만들었다. 땅굴을 판 목적은 남침 1시간 내에 1개 연대 규모를 침투시키고 남파 간첩의 비밀 통로로 이용하여 요인의 납북을 돕는 통로 및 우리 군의 기밀을 탐지해 내기 위한 것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남북이 서로 비방을 중지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모색하고자 다정하게 손을 잡던 시기여서 우리 국민의 충격은 몹시 컸으며, 동시에 북한의 양면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숭의전

임진강변 아미산 자락에서 정상을 조금 못 미쳐 아늑한 평지에 자리 잡은 숭의전지는 고려시대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다. 이곳에서는 북동에서 남서로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조선 정종 1년(1399년)에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세종 7년(1425년)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고려의 충신 15명의 제사도 함께 지냈는데 건물의 관리인은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다고 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 나라를 그리워하며 정성껏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을 고려 왕족들의 설움과 그리움이 담긴 곳, 숭의전지. 현재의 건물은 6.25 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73년에 재건한 것으로 당시 숭의전은 현재의 모습보다 규모가 더 컸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던 곳인데, 6·25전쟁으로 전각(殿閣)이 소실되었다.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에는 왕씨 후손이 정전을 복구했고, 국비 및 지방보조로 1975년 2월에는 배신청(陪臣廳)(13평)을 1976년 1월에는 이안청(移安廳)(8.7평)을 1977년 2월에는 삼문(三門)을 신축하였다.
이 숭의전 일대는 임진강안, 단애절벽상 경승지로서, 노수가 울창하여 전각을 싸고 각하(脚下) 일대는 만경창파(萬頃蒼波) 회변유수(回邊幽水)한 별천지이며, 여조(麗朝)의 왕씨 문중들이 완강하게 이씨조선을 거부하였고, 갖가지 설움을 언누르면서 전조(前朝)를 흠모한 충절이 깃들여진 곳 이다.


군남댐

북한에 위치한 황강댐의 방류에 대비하고 임진강의 홍수 조절을 위해 2010년 7월부터 운영되고 있는 댐이다. 

군남댐은 북한이 임진강 상류에 5일댐과 황강댐의 건설 이후 방류와 이로인한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2006년 10월부터 건설이 시작됐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중이던 2009년, 북한이 황강댐 물을 무단 방류해 경기도 연천에서 6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당초 2011년 8월 예정이었던 완공일을 앞당겨 2010년 6월 30일에 완공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홍수조절 전용 단일목적댐이지만, 임진강 유역의 한정된 수자원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농업용수 공급의 역할도 하고 있다.


태풍전망대

확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DMZ, 맑은 날엔 개성 땅까지 보인다는 최전방 전망대
 
태풍부대에서 1991년 12월 3일 건립한 태풍전망대는 서울에서 약 65Km, 평양에서 14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군사분계선까지 800m, 북한군 초소까지는 1,600m 거리에 위치한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주력 부대가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공격을 해오던 루트였다. 전망대에 오르면 DMZ 안을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과 북한의 오장동 농장, 4월 5일댐 등을 볼 수 있고 월동하는 두루미 무리들도 볼 수 있다. 전망대 앞에는 6.25 전쟁 당시 격전지로 유명한 베티고지와 노리고지가 있다. 노리고지라 불렸던 산 정상에는 전쟁 당시 1㎡에 4,500발의 탄약이 쏟아져 산의 높이가 5m 가량 낮아졌고, 거기서 흘러내린 토사가 둥근 보름달 같던 용소를 메워 지금의 반달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
전망대에는 국군들의 종교 집회를 위한 교회, 성당, 성모상, 법당, 종각 등이 있고 망향비, 6.25 전쟁 전적비, 6.25 참전 소년전차병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2Km 가량 떨어진 임진강 필승교에서 수습한 북한의 생활물품과 무장 간첩들의 침투 장비 일부가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도 위치해 있다.


급수탑

연천역 급수탑은 1914년 서울에서 원산까지의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중간지점인 연천역에 2개의 급수탑을 세워 상하행선의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급수탑의 높이는 23m로 외부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일제 수탈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를 보여준다.
급수탑은 이후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건립 당시에는 기관차 뒤에 달린 탄수차에 물을 공급하는 동안 물물교환 등 상거래가 활발하여 시장의 역할을 하였다.

연천역 급수탑은 강원도 도계역 급수탑, 추풍령역 급수탑, 충남 연산역 급수탑 등과 함께 철도 역사의 이해와 근대 교통사 연구를 위한 주요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3년 1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재인폭포

재인폭포는 연천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중 하나로 한탄강 지형이 빚은 절경이다. 연천7경 중 으뜸가는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다이아몬드처럼 부서지는 하얀 물살과 그 아래 에메랄드빛으로 펼쳐진 소(沼)는 보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검은 현무암 주상절리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름답기로 유명해 제주도 천지연폭포와 비견되곤 한다. 높이 약 18m의 폭포수가 너비 30m, 길이 100m의 소 위로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재인폭포는 원래 평지였던 곳이 갑자기 움푹 내려앉으며 지장봉에서 흘러내리던 계곡물이 폭포를 이루게 되었다. 폭포는 지금도 보이지 않게 변화하는 중이다. 폭포의 물살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상절리를 조금씩 침식시켜 나갔고, 폭포도 조금씩 뒤로 물러앉게 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강변에서 350m 정도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


신탄리역

신탄리역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있는 경원선의 철도역이다. 
개통 당시에는 신호장에 불과했지만, 6.25 전쟁 휴전 후인 1954년 7월 1일에 경원선 이남 구간의 마지막 역으로 승격되었다. 그 전까지는 미군열차 등등이 대광리역까지만 왔었다. 2012년 11월 19일까지 경원선의 남측 종착역이었으며, 동시에 한국철도공사에서 정상 운영 중인 철도역 중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물론 경기도 내 철도역 중 최북단이라는 기록도 보유. 동해북부선의 제진역이 위도 상으로는 더 북쪽에 있지만, 민통선 내에 있는 데다가 이남 구간은 아직 구상 혹은 설계 중이라 사실상 영업 중단 상태다.
원래 경원선은 서울 용산역에서 원산역까지 연결되어 있던 철도 노선이었으나, 한반도 분단 후, 운행하는 경원선의 마지막 역이 되었다. 2012년 3월 21일 경원선 통근열차 운행 재개와 함께 영업을 재개하였으나, 그 후 2012년 11월 백마고지역까지 연장 개통 운행하게 되면서, 현재 경원선이 운행하는 마지막 역은 백마고지역이 되었다. 



열쇠 전망대

 열쇠전망대는 육군 열쇠부대(육군 제5사단)가 북녘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역에 안보 교육과 망향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1998년 4월 11일 건립하였다. 열쇠전망대는 자칫 안보 불감증에 빠지기 쉬운 전후 세대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되살려 주고 실향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랠 수 있는 대표적인 안보관광 코스이다. 전망대에서는 DMZ 철책선과 최전방 초소인 GP 등이 한눈에 들어오며, 망원경 5대 설치로 DMZ 현장을 보다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망대 주변에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종교별 시설과 국내외소식, 우리나라 생활상을 북측에 알려줄 수 있는 전광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 2009년 기존의 전시실을 리모델링해 재개방했다. 내부 전시실에는 북한의 생활용품과 대남 전투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어 북한의 실제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1970년대의 내무반과 현재의 내무반을 비교할 수 있으며 녹슨 철모, 지뢰 등 분단의 상흔을 체험할 수 있는 유물이 연출,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 영상브리핑 시설과 관람석 등 최신장비를 교체 투입하고 DMZ 모형 지형도판도 설치했다. 2층 전시실 입구에서는 멧돼지, 고라니, 두루미, 오소리 등의 전시물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