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등대 바로 옆에는 평화공원이 있다.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 연평해전과 연평포격 등 세 차례 북한 도발로 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공원 중앙에는 두 차례 연평해전에서 죽고 다친 25명의 장병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 모양이 육지에서 탱크 등 기계화 부대의 진행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용치(龍齒·용의 치아) 구조물을 닮았다. 연평도에서는 용치 구조물이 적 군함이나 선박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해안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무력 충돌 희생자 추모 공원과 남북 화해 분위기로 다시 켜진 등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연평도는 긴장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남북 관계의 축소판이다.
수십 개의 섬을 거느린 덕적군도에서 가장 큰 덕적도에는 해수욕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만큼 등산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최고봉인 국수봉과 제2봉인 비조봉 등 산세가 좋기로 소문난 덕적도에서의 등산은 울창한 적송림 속을 거닐며 속세와 단절된 듯 호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특색이 있다. 특히 비조봉 등산코스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길, 각양각색의 바위들을 지나가는 바윗길 등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인기가 좋다. 비조봉 능선과 연결된 감투바위, 망제봉 등도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으로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장엄한 산세가 펼쳐지는 비조봉 정상 위에 서면 인천 앞바다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나라 서해 최북단 섬으로 북한 땅과 지척에 있는 백령도. 북한의 월래도가 내려다보이는 용기원산에 국토 끝섬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2013년 6월 5일 개장한 끝섬전망대는 망원경을 이용해 북한의 섬과 육지를 관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로 손꼽힌다. 또한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백령도 곳곳을 조망할 수 있다. 좌측으로는 용기포 신항과 사곶해변이 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멀리 북한 땅과 하늬해변을 바라다볼 수 있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늬해변 앞 돌섬은 천연기념물 제331호인 점박이 물범이 서식하는 곳이다. 간혹 망원경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영흥대교를 건너 영흥도에 진입 왼쪽길로 들어가면 영흥면사무소 방향이고 방파제 도로를 조금 더 달리면 동산이 하나 나온다. 1백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하늘로 높이 솟은 기념탑과 바다를 향해 용감히 돌진하려는 듯한 포즈의 해군병사 동상을 보게 되는데 이 곳이 전적기념비가 위치한 곳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50년 9월 15일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세계사적으로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끝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장별들 외에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등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었다. 이 작전 기간 중 9월 13일 북한의 대대급 병력을 맞이한 청년방위 대원들은 703함대의 필사적인 함포 지원아래 작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때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투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 비문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괴의 불법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50년 9월 15일 세기에 빛나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로써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승승장구 북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인천 상륙작전에 앞서 한국 해군 기동함대(701,702,704,513,301,307,309,310,313함)의 승조장병으로 편성한 육전대가 함포 지원 하에 적전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동년 8월 18일 덕적도를, 8월 20일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하고, 8월 23일부터는 LST에 탑제하고 있던 해군 이동기지 육전대가 상륙하여 영흥도 청년방위대와 함께 이 섬을 사수함으로써,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고 상륙 기동부대의 안전항행을 보장 하였다. 한편 동년 8월 24일 영흥도를 거점으로 작전을 개시한 한국 해군첩보부대는 9월1일 미 극동군에서 파견한 첩보팀과 긴밀한 협조 하에 상륙목표 해안을 비롯한 인천, 서울, 수원 등 적이 장악 중인 지역에서 용감하게 첩보활동을 전개하여 상륙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작전기간 중 9월13일 북괴군은 대대급 병력을 영흥도에 투입하여 일시시 점령하였으나 용감 무쌍한 우리해군장병들과 청년방위대원들이 703함의 필사적인 근접 함포 지원 아래 적을 격퇴하였다. 여기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해군장병 및 현지 청년방위대의 빛나는 무훈과 도민들의 드높은 애국심을 기리고 삼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삼가 비를 세운다.
- 1992년 12월 2일 해군참모총장
조선 중기의 명장이었던 임경업 장군이 가시나무를 놓아 조기잡이가 시작됐다는 인천 앞바다 연평도에 조기잡이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기 역사관’이 11일 문을 열었다.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산 10-115 330㎡ 부지에 지상 2층, 연면적 154㎡규모로 지어진 ‘연평도 조기 역사관’에는 말 그대로 조기에 관한 것들로 가득하다.
특히 연평도는 성어기인 1950∼196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3천여척의 어선과 수만여명의 상인들로 북적되던 우리나라 최대의 어장으로 역사관 개관은 조기잡이 풍물복원으로 이어지게 됐다.
전시관 1층에는 조기역사 자료를 비롯해 조기잡이 영상시설과 천혜의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또 2층에는 망원경이 설치돼 관광객들이 북한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로 꾸며졌다.
역사관 건립은 연평도의 조기역사 등 잊혀져 가는 향토사를 발굴, 자라나는 2세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한 것으로 옹진군이 총사업비 3억원을 들여 세웠다.
이 역사관은 인근 얼굴바위와 빠삐용 절벽 등과 연계, 연평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명소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조선 인조 14년 (1636년) 연평 해역에서 조기가 처음 발견된 이후, 연평도는 전국에서 몰려든 어선들이 거쳐가면서 인근 해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연평해역이 황금의 조기파시어장이라고 불릴 정도였고요. 이러한 어선들이 안전하게 조업을 하게끔 1960년 3월 23일 연평도 등대의 불빛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불빛이 북한 간첩의 해상 침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1974년 가동을 중단했고, 1987년 4월에는 직원들이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는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서해 5도에 평화수역이 조성되었다면 연평도 등대의 불을 밝히기로 결정했습니다. 2019년 5월 17일에는 정부, 지자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점등식 행사도 열렸지요. 정부가 등대 점등의 이유로 든 것은 향후 남북 간의 해상 교류가 활발해지면 이 등대가 선박들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 지난 4월 1일 일출부터 일몰까지였던 연평도의 출어 시간을, 일출, 일몰 전후로 각각 30분씩 늘려주기도 했습니다. 야간 조업을 하는 어선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등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가까운 곳에는 포격전 전사자 위령탑과 연평해전 전사자 추모비가 있다고 하니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서쪽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섬이 백령도 임을 인증하는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사곶해변을 바라보고 있고, 뒤로는 간척사업 제방도로를 두고 있지요. 옆에는 담수호(저수지)가 있습니다. 서해최북단백령도비는 섬에서 백령도라는 글자가 들어간 유일한 비석으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기념촬영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사단법인 한국유격군 백호부대 전우회(회장·민종선)는 백령도에 백호부대 전적비를 설립한다.
백호부대 전우회 김언영 사무총장은 26일 권율정 인천보훈지청장을 방문, 한국전쟁 당시 서해 최북단 백령도를 거점으로 투쟁했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적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보훈지청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황해도 장연군 출신인 유격군 8240부대원들은 1951년 2월부터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까지 대청도, 육도, 월래도 등을 거점으로 공을 세웠다. 현재 236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백호부대 출신 대원들은 매년 9월 하순 백령도에서 망향제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백호전우여! 영원하라... 오월 초목 단심으로 물들인 충혼 이들과 더불어 길이 남으리라."
매바위 전망대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매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로부터 대청도는 송골매의 일종인 해동청의 채집지였다고 합니다. 대청도 서내동에는 ‘매막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를 통해 예로부터 매를 기르고 훈련시키는 매막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지요. 고려시대 귀족층에서는 매사냥이 성행했는데, 고려 충렬왕은 매 사육 및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했습니다.
대청도와 해동청
진평왕 때 매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매사냥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중엽에 이르러서는 매사냥이 본격적으로 성행했는데, 백령도와 대청도의 매가 전국에서 제일이었고 이 매를 ‘해동청 보라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대청도에 도착하면 주민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새가 대청도에 있는데, 이걸 잘 찾아보라는 수수께끼를 내줍니다. 답은 수리봉에 있지요.
한국 전쟁 당시 자진해서 군에 들어가 용맹히 싸우다 전사한 여섯 용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연평도 주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육용사 충혼탑’
6.25 전쟁 당시 패전한 공비가 양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만행에 분노한 연평도 청년 30여명이 구월산 공비 토벌 작전에 자진 종군하게 되고, 이 작전에서 전사한 여섯 명의 용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건립한 충혼탑입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습니다.
한국동란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통념을 금할 수 없는 동시 패전잔당 공비가 양민 약탈 만행함을 격념한 연평도 청년 30명은 황해도 구월산 공비토벌작전에 자진 백의종군하여 해군 503함장 중위 장근섭 지휘 아래 용감히 싸우다가 1950년 12월 20일 적탄에 숨져간 6용사의 영령을 위로코자 연평도 유지, 가관장 및 재경인향우회원들의 정성으로 위령탑을 건립합.
육용사명단 (연령순) 장희규, 김갑순, 유홍섭, 박정섭, 박광호, 막만복
백령도에서 사곶해변을 지나 용기포 구선착장 방향으로 가면 돌 하나에 소망을 정성껏 담은 통일염원탑을 볼 수 있다. 탑에서 마을 뒷산 언덕 너머로는 썰물 때만 갈 수 있는 해식동굴이 있고 목책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는 1960년대 사용하던 용기포 등대가 나온다.
과거 백령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을 인도하던 옛 등대로, 멋진 바위들과 어울려 여전히 절경을 이루고 있다. 걷기를 즐겨한다면 도로변 해안길을 따라 끝섬전망대까지 가는 트래킹 코스 용기포 맞이길을 권한다.
1950년 중공군 참전으로 1.4 후퇴 당시 이곳으로 북한의 많은 사람이 피난했으며, 1951년 2월 28일 유엔군 담당 하여 8,000여 명이 반공 유격대(8240부대: 동키부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과 백령도 수호에 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 전공을 기리고 장렬히 산화한 516명 영령의 넋을 위로하고자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와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협조를 받아 이 비를 건립함 (전과 :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 수행, 북괴군 57명 생포, 적 사살 4,000명)
6·25 전쟁 당시 백령도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서해 일대에서 피난민의 남하를 돕고, 북한 공산군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국제연합군과 국군의 작전에 이바지한 5만여 명의 유격대원의 전적을 기념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3,000여 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1961년 8월 15일에 세워졌다. 1950년 11월 국제연합군이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고 서울∼의주 간의 도로가 공산군에 의해서 차단되자, 황해도 재령(載寧)·안악(安岳)·평산(平山) 등지와 인근의 섬 출신 청장년이 자발적으로 궐기하여 유격대를 조직, 서해 일대의 바다와 섬에서 적을 교란·습격하여 30만 명의 피난민을 남하시켰고, 국제연합군과 국군의 지원을 받아 50개 부대로 재편한 후 유격작전으로 수많은 공산군을 살상 ·생포하여, 공산군 3개 사단을 이 지역에서 견제 ·교착시키는 등 국제연합군 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이 세운 전과와 입은 피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한때 그 병력은 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인명 피해만도 3,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연평도는 황해도 해주시의 군 일부와 가깝고, 북방한계선 바로 밑에 있는 섬이라 황해도 주민이 많이 피난을 왔던 섬입니다. 이후 정전협정이 일어나 북한 땅을 가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에 망향비와 망배단을 세우게 됩니다. 망향비 기둥에는 망향의 한을 노래한 망향가가 새겨져 있으며, 망향 전망대에 비치되어 있는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곳에서는 석도, 대수압도, 소수압도, 감도, 장재도 등 옹진군에 속해있는 여러 섬들을 관측할 수 있으며 강령군 옹진군 등 북한의 육지를 잘 관측할 수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북한 해주의 시멘트공장에서 올라오는 연기까지 볼 수 있을 겁니다.
망향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정의 피 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 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군인 정신을 기리는 위령탑입니다. 연평도 평화공원에 있는 이 위령탑은 두 전사자의 얼굴 부조와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서 하사는 휴가를 받아 인천으로 나가려고 여객선에 탑승하던 중,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해병 부대로 자진 복귀하다 변을 당했으며, 문 일병은 대학에 입학한 뒤 1학기를 마치고 해병이 된지 3개월만에 포탄 파편을 맞아 전사했습니다.(2012년, 11월 12일 기사)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추모글이 새겨져있습니다.
조국 수호를 위한 뜨거운 염원을 가슴에 품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젊은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곳에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국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니,
부디 저 하늘에서 평화의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굽어보며 편히 쉬소서.